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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왕을 지키려 했던 남자, 단종 복위를 꿈꾼 '금성대군' 이야기
2026-04-10 12:12:27
관리자
119화 단종과 살고 싶었던 남자, 금성대군
‘왕과 사는 남자’가 1,6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명량에 이어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올랐다. 단종(端宗:1441~1457)과 엄흥도(嚴興道)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영화에서는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의 단종복위 운동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금성대군은 누구이며, 그는 왜 그토록 형님인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에 칼날을 겨누면서, 끊임없이 단종복위 운동을 추진해 나갔을까?
금성대군은 누구인가?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 8명의 대군과 정소, 정의 등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이 왕으로 재위하고 있던 1426년 3월 28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는데,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懿嬪) 권씨가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종실록』 1453년(단종 1) 6월 26일의 기록을 보면, 금성대군은 “신이 의빈에게서 자라나서 그 은혜가 심히 무거운데, 나이가 지금 70이므로 궁중에 기거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신은 부마(駙馬)의 예가 아니니, 원컨대 신의 집으로 나가도록 명하시어 평안하게 봉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라고 청한 기록이 보인다. 자신을 키워 준 의빈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봉양하길 원했지만,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7세 때인 1433년(세종 15)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 4월에 바로 위의 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2세 때인 1437년(세종 19) 2월 참찬을 지낸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李孟漢)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방석(芳碩)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의안대군은 1398년 왕자의 난으로 처형되었다가, 태종 때 소도군(昭悼君)의 시호를 받고, 숙종 때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추증되었다.
1440년(세종 22) 6월 창진(瘡疹)에 걸려 위독한 상태까지 갔는데, 세종이 의원를 보내 진료하게 하는 한편 영추문을 열어두고 수시로 의원들에게 그의 병세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병세를 묻는 것이 길에 이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금성의 병이 낫자, 의원 노중례(盧重禮)에게 안구마(鞍具馬)를 지급하고 시병한 환관, 관료들에게 직접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왕과 사는 남자’가 1,6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명량에 이어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올랐다. 단종(端宗:1441~1457)과 엄흥도(嚴興道)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영화에서는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의 단종복위 운동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금성대군은 누구이며, 그는 왜 그토록 형님인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에 칼날을 겨누면서, 끊임없이 단종복위 운동을 추진해 나갔을까?
금성대군은 누구인가?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 8명의 대군과 정소, 정의 등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이 왕으로 재위하고 있던 1426년 3월 28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는데,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懿嬪) 권씨가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종실록』 1453년(단종 1) 6월 26일의 기록을 보면, 금성대군은 “신이 의빈에게서 자라나서 그 은혜가 심히 무거운데, 나이가 지금 70이므로 궁중에 기거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신은 부마(駙馬)의 예가 아니니, 원컨대 신의 집으로 나가도록 명하시어 평안하게 봉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라고 청한 기록이 보인다. 자신을 키워 준 의빈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봉양하길 원했지만,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7세 때인 1433년(세종 15)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 4월에 바로 위의 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2세 때인 1437년(세종 19) 2월 참찬을 지낸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李孟漢)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방석(芳碩)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의안대군은 1398년 왕자의 난으로 처형되었다가, 태종 때 소도군(昭悼君)의 시호를 받고, 숙종 때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추증되었다.
1440년(세종 22) 6월 창진(瘡疹)에 걸려 위독한 상태까지 갔는데, 세종이 의원를 보내 진료하게 하는 한편 영추문을 열어두고 수시로 의원들에게 그의 병세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병세를 묻는 것이 길에 이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금성의 병이 낫자, 의원 노중례(盧重禮)에게 안구마(鞍具馬)를 지급하고 시병한 환관, 관료들에게 직접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